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릴케 시 필사집
쓰는 기쁨
드러나는 것과 숨겨지는 것,
소멸하는 것과 소멸하지 않는 것,
장미는 삶과 죽음이라는 모순의 명제를
품고 사는 인간 존재의 표상이 아닐까?
인간 존재의 본질과 삶의 비밀을 속삭이는 릴케의 시
쓰는 기쁨으로 다시 만나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누구의 잠도 되지 않겠다는 갈망이여
_라이너 마리아 릴케
출판사 서평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는 삶의 역설을 포착하여 노래한 릴케의 시
소멸하는 것과 소멸하지 않는 것, 드러나는 것과 숨겨지는 것, 다가오는 것과 멀어지는 것, 생명과 죽음…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게는 이러한 두 가지 세상이 공존한다. 릴케의 묘비명이기도 한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누구의 잠도 되지 않겠다는 갈망이여”라는 시의 구절은 단순히 장미의 아름다움을 넘어, 인간 존재가 지닌 근원적인 모순과 생명력을 상징한다. 릴케에게 장미는 소멸하는 것과 소멸하지 않는 것이 공존하는 매개체다. 겹겹이 쌓인 장미 꽃잎은 마치 수많은 ‘눈꺼풀’처럼 안으로 침잠하며 외부의 잠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강한 주체적 의지를 드러낸다. 이는 유한한 삶 속에서 영원한 본질을 갈망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다. 눈꺼풀은 외부 세계를 보는 도구인 동시에, 닫음으로써 내면의 세계로 침잠하는 도구다. 끊임없이 외부 세상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자기만의 깊은 고독 속으로 숨어드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상징하는 놀라운 은유다.
삶과 죽음의 공존을 노래한 이 시를 통해 릴케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 릴케에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탄생을 선물하는 씨앗, 열매와 같은 것이다. 자기 자신을 소멸시키며 존재를 증명하고 완성하는 과정이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숙명이다. 죽음이 곧 생명의 종말은 아니다. 꽃은 피었다가 지고, 생명은 태어났다가 죽는다. 이것들은 다시 우주 속에서 순환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향해 가지만, 그 유한함 때문에 역설적으로 삶의 매 순간이 빛나는 존재다.
릴케 시 필사집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의 시편들도 마찬가지다. 릴케는 무서운 직관으로 조각조각 깨어져 흩어진 죽음들을 적시해 내고, 그것이 우리 생명이 품은 미스터리, 신비, 미지 그 자체임을 일러준다. 생명이 순환하며 드러내는 빛과 아름다움을, 그리고 생명 회귀의 신비와 경이로움을 릴케의 시에서 만나보자.
생명이 번창하는 위대한 여름날이 지나자 천지간에는 죽음과 조락의 계절이 닥친다. 하지만 가을에는 죽음의 쓸쓸함만이 있는 게 아니다. 가을은 처처에 과일들의 성숙과 인격의 원숙을 독려하는 신의 자비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마침내 남쪽의 따뜻한 날씨를 이틀이나 더 머물게 한 신이 베푼 자비 덕분에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이 든다. 한편으로 집 없이 떠도는 사람은 현세에 머무는 동안은 그 방황을 끝내지 못하고, 혼자인 사람은 고독이라는 고치에 웅크린 채 지내게 될 테다. 가을이 충만과 텅 빔, 성숙과 조락, 생명의 화사한 절정과 죽음이 품은 고적함이라는 양극화의 경계에 걸쳐진 계절인 까닭이다. (추천사 중에서_장석주)
릴케의 깊이 있는 사유와 놀라운 시적 감성… 쓰는 기쁨으로 피어나다
우리 인생이란 무엇이고, 우리의 낮과 밤이란 무엇인가? 혹자는 인생은 짧고 조악하며 비참으로 뭉친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환희와 경이로 가득 찬 시간이라 말하는 이도 있을 테다. 릴케가 그 해답을 줄 수 있을까? 릴케는 인간의 창백한 내면에 상수로 남은 고독과 죽음, 사랑과 고통, 존재와 탄식을 관조하며 노래한다. 사물과 그 배후를 통찰하며 거기에서 삶과 죽음의 본질, 그리고 사랑의 슬픔과 환희를 포착한다. 릴케 또한 수없이 많은 시를 쓰며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했으리라. 산다는 건 무얼까? 그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생을 꼭 이해할 필요는 없어요 / 그냥 두면 축제처럼 될 터이니 / 모든 날을 그냥 그렇게 두세요 / 아이가 길을 걸으며/ 바람이 불 때마다 날아드는 꽃잎 / 선물처럼 그냥 두듯이(‘인생을 꼭 이해할 필요는 없어요’ 중에서)
답을 찾았을까? 릴케는 우리에게 인생을 굳이 다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속삭인다. 젊은 시절, 그 또한 젊음의 오만이 시키는 대로 인생의 모든 걸 속속들이 알고자 했을 것이다. 수많은 시도와 좌절 끝에 뒤늦게 맞닥뜨린 진실은, 유한한 생명 존재인 인간의 머리로는 아무리 궁구해도 인생이란 불가해한 것이라는 진리였을 테다. 그래서 릴케는 “모든 날을 그냥 그렇게 두세요”라고 가만히 말한다. 인생을 선물로 받아들이고, 축제처럼 즐기는 것이 완숙한 태도임을 귀띔해 주는 것이다.
독자들 또한 삶을 이해하고 만족과 기쁨을 그 속에서 찾고 싶을 것이다. 릴케 시 필사집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의 시편들을 한 편 한 편 필사하면서 릴케가 발견한 삶의 비밀을 함께 깨닫고 누릴 수 있길 바란다.
“릴케의 시는 내 시적 여정의 나침반이자 스승이었다.” _파블로 네루다
시집을 몰입해서 읽는 내내 가슴에 밀려드는 경외감과 벅찬 환희로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이게 바로 진짜 시다!”라고 외치고 싶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릴케의 시는 내 시적 여정의 나침반이자 스승이었다.”라고 고백할 정도다. 릴케는 인간의 창백한 내면에 상수로 남은 고독과 죽음, 사랑과 고통, 존재와 탄식을 관조하며 노래한다. 그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겪는 보편 경험일 테다. 릴케는 사물과 그 배후를 통찰하며 인간 존재의 의미를 파헤친다. _장석주(시인, 문학평론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20세기 독일어권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서정시인으로 꼽히는 작가로, 《두이노의 비가》, 《말테의 수기》 등 문학사에 남을 걸작을 내놓았다. 1875년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르네 카를 빌헬름 요한 요제프 마리아 릴케다. 열한 살에 육군유년학교에 들어가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자퇴한 뒤, 1895년 프라하대학에 입학했다가 1896년 뮌헨으로 대학을 옮기는데, 뮌헨에서 운명의 여인 ‘루 살로메’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평생 시인으로 살겠다고 결심한다. 살로메의 권유로 르네를 독일식 이름인 라이너로 바꿔 필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01년 로댕의 제자였던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결혼한 뒤 그 자신도 로댕을 만나 예술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았고, 로댕의 비서로 일하기도 했다. 클라라와 헤어진 뒤 로마에 머무르며 근대인의 소외와 고뇌를 깊이 있게 다룬 걸작 《말테의 수기》를 완성했다. 사람과 사물, 풍경의 내면을 응시하고 그 본질을 언어로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스위스의 뮈조트 성에 머무르는 동안 릴케는 마침내 수년 동안 끌어왔던 대작들을 완성했다. 1922년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연달아 발표하며 시인으로서의 정점을 찍었다. 삶과 죽음의 합일, 지상 존재의 시적 변용이라는 릴케의 철학이 집대성된 작품으로, 20세기 문학사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섬세하고도 치열했던 그의 언어는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독자들의 영혼을 울리고 있다. 1926년 백혈병으로 스위스 발몽 요양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서강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8년간 근무했다. 이후 대안교육에 관심을 가져 독일 뉘른베르크 발도르프 사범학교에서 유학했다. 현재 바른번역에서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밤의 사색》 《아비투스》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불확실성의 시대》 등 80여 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추천하는 글 _ 장석주
옮긴이의 글 _ 배명자
1부 술꾼의 노래
신이 다가와 | 내 눈을 멀게 해도 | 광야의 파수꾼 | 고독 | 어느 젊은 수도사의 목소리 | 이 마을에 마지막 집이 있다 | 오 주여 | 기사 | 사랑에 빠진 여인 | 불안 | 가을날 | 가을의 끝 | 예감 | 진보 | 가을 | 저녁 | 엄숙한 시간 | 거지의 노래 | 술꾼의 노래 | 고아의 노래 | 그러한 밤이면 1 | 그러한 밤이면 2 | 끝맺음 | 도시의 여름밤 | 소녀의 탄식 | 사랑의 노래 | 어느 어린 소녀의 묘비 | 피에타 | 시인의 죽음 | 붓다 | 중세의 신 | 시체 안치소
2부 깨어 있는 숲이여
내 영혼 행복을 갈망하네 | 봄엔가, 꿈에선가 | 그대에게 봄을 보여주고 싶어요 | 내가 그리워하는 것 | 내가 정원이면 좋겠습니다 | 마리아 | 우리는 무서우리만치 아주 쓸쓸하여 | 늙은 버드나무 한 그루 | 이 노란 장미를 | 요람 대신 작은 관을 | 저기 저 하늘에 | 난들 알까? | 희뿌연 회색 하늘 | 고요한 집에 | 거대한 분꽃처럼 | 오월의 밤 | 정말이에요 | 하얀 국화가 핀 날 | 너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 모두가 알았다 | 강림절 | 나는 늘 같은 길을 걷는다 | 은빛 날개의 하얀 영혼들 | 깨어 있는 숲이여 | 인생을 꼭 이해할 필요는 없어요 | 내가 믿는 정원 | 첫 장미들이 깨어나요 | 너른 들에는 기다림이 있었네 | 나는 고아입니다
3부 오래된 집 안에서
시냇물은 나직이 노래하고 | 불꽃 백합 | 그럼에도 불구하고 | 저 멀리서 저녁이 | 겨울 아침 | 오래된 집 안에서 | 성당 안에서 | 11월의 어느 날 | 저녁 | 젊은 조각가 | 밤에 | 꿈 | 불쌍한 아이 | 가을의 정취 | 어머니 | 고향의 노랫소리 | 여름 저녁 | 구름 동화 | 밤 풍경 | 불면 | 태양의 마지막 인사 | 평화 | 투쟁 | 승리 | 가을에 | 도시 외곽에서 | 성 하인리히 곁에서 | 고향의 노래 | 콘스탄츠
4부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시인 | 이별 | 죽음의 체험 | 청수국 | 여름비 내리기 전 | 아버지의 젊은 날의 초상 | 1906년의 자화상 | 크레타섬의 아르테미스 |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 | 연금술사 | 아담 | 이브 | 정신병자들 | 거지들 | 맹인 | 표범 | 성 세바스티안 | 천사 | 백조 | 바다의 노래 | 침대 | 자장가 | 고독한 사람 | 촘촘히 별을 뿌려놓은 | 눈물이여 | 떠밀려가는 존재들 | 눈물 항아리 | 아 대지여 |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자연의 하찮은 변화의 기미를 놓치지 않고, 거기에서 삶과 죽음의 본질, 그리고 사랑의 슬픔과 환희를 포착하는 시인의 상상력은 비범해서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잠든 의식을 깨우는 죽비 같다. 그 찰나 우리는 화들짝 놀라 온갖 예감들로 가득 찬 세상과 눈을 맞추며 깨어나는 것이다. _<추천의 말> 중에서
고독은 비와 같습니다 / 바다에서 석양을 향해 오릅니다 / 아득히 외진 평원에서 / 고독한 하늘을 향해 오르고 / 하늘에 이르러서는 도시로 와서 내립니다 / 고독은 동틀 녘에 비로 내립니다 / 모든 골목이 아침을 향할 때 / 아무것도 찾지 못한 몸들이 / 실망하고 슬퍼하며 서로를 놓아줄 때 /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함께 / 한 침대에서 자야 할 때 / 그때 고독은 강물 되어 흐릅니다… _〈고독〉
검은 철갑을 두른 기사 / 떠들썩한 세상을 향해 말을 달리네 / 밖에는 모든 것이 있다네 / 낮과 계곡 그리고 친구와 적과 성대한 만찬, / 오월과 소녀와 숲과 성배가 있다네 / 그리고 신조차 친히 수천의 얼굴로 / 모든 거리에 서 있다네 / 그러나 기사의 철갑 안, 가장 깜깜한 뒤편에 / 죽음이 웅크리고 앉아 생각하고 또 생각하리라: / 숱한 날을 웅크려 있어야 했던 내 좁은 은신처에서 / 마침내 나를 끄집어내 / 사지를 펴고 / 악기를 켜고 / 노래 부르게 해줄 / 낯선 해방의 칼이 칼집을 박차고 나올 날 언제런가 _〈기사〉
시든 숲에 울리는 새 울음소리 / 이 시든 숲에선 무의미해 보입니다 / 그런데도 선명한 새 울음소리 / 세상에 나온 그 순간에 / 시든 숲 위로 하늘처럼 드넓게 퍼집니다 / 만물이 순순히 그 울음소리에 자신을 맡깁니다 / 온 땅이 그 소리 안에 소리 없이 몸을 누인 듯하고 / 거대한 바람마저도 그 소리에 기대는 듯합니다 / 앞으로 나아가려던 시간은, / 그 소리에서 벗어나면 /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 창백하고 조용합니다 _〈불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