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목사의 느릿느릿 이야기

박철 지음

발행
2003년 12월 17일
쪽수
272 쪽
정가
9,800원
전자책
ISBN
978-89-88344-74-3
판형
153   x  223 mm

책 소개

오마이뉴스〈느릿느릿 이야기〉연재 중 '속도'와 '편리'의 시대를 역행하는 '느릿느릿'의 삶

박철 목사의 막내둥이 딸 은빈이는 걸어서 15분 걸리는 길을 30분이나 걸려서 학교에 간단다. 왜 그렇게 천천히 가냐고 묻는 아빠에게 은빈이는 맹랑하게도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아빠, 내가 느리게 가니까 가다가 꽃도 보고, 나비도 보고, 벌레도 보고, 벌레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움직이는 것도 보고, 또 가다가 구름도 보고, 나무도 보고,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고 그러니까 참 좋아!"이 어린아이의 대답과는 달리 우리는 너무 빨리, 서둘러 가다가 많은 것들을 못 보고 지나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저자는 이 책을 통해 어린 시절 눈물겨운 이야기를 끄집어내기도 하고, 그 동안 만나 온 아름다운 사람들을 돌이켜보기도 하고, 현재 함께 살고 있는 가족과 정겨운 이웃들의 삶을 따듯하게 들여다보면서, 우리가 잊고 있는 것과 놓치고 있는 것들은 과연 무엇일까를 되짚어 보게 한다. 그러나 '느릿느릿'을 외치는 저자 자신도 실상은 얼마나 '느릿느릿' 살아가기가 어려운지,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허둥대고 급하게 달려가는지 고백한다.

 

제발, 이 속 좁은 가슴에 살기 띤냉소가 머물지 않았으면제발 이 나약한 육신에 섬뜩한독버섯이 자라지 않았으면제발, 이 허망한 세월에수습할 수 없는 속물 근성이발동하지 않았으면제발, 이 싱거운 느낌이라도 지키면서어디에도 빌붙지 않는 자유혼으로 남아서한 줌의 흙이라도 거름이라도 되었으면- 박철 詩 <제발> 

 

시골목사의 소박한 이야기 

펑펑 내리는 눈길을 뚫고 도착한 박철 목사의 첫 부임지는 강원도 정선 두메마을이었다. 다음날 새벽, 새벽기도회를 알리는 종을 울리다 올려다본 하늘에서는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때의 황홀함과 경외감이란…. 박 목사는 바로 눈 바닥에 오체투지하고 앞으로 살아가야할 농촌 목회의 삶에 귀의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이후 강원도 정선, 경기도 남양을 거쳐 강화도 교동섬에 이르기까지 20여 년 농민과 함께한 그의 삶에는 빗길에 미끄러지면서도 과수기를 머리에 이고 오고, 처음으로 글을 깨쳐 고마운 마음에 100원짜리 크림빵과 사과 한 알을 선물로 주던 성도의 사랑과, 한끼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봄부터 준비한 나물 반찬을 한상 가득 내온 시골 노인의 헌신과, 생일날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넥타이핀을 사고 들꽃다발을 안겨 주던 순박한 시골 아이들의 정성이 녹아 있다.<시골목사의 느릿느릿 이야기>에는 순수하고 진솔한 저자의 시와 따뜻한 시선이 그대로 전해지는 사진들이 담겨  있다. 시와 사진들은 박철 목사의 소박한 이야기를 읽는 우리의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해주어, 추억 속 그 시절로 데려다 주기도 하고, 한 구석마다 물꽝이 자리한 논자락 그 옆으로 크고 작은 전봇대들이 줄지어 서 있는 강화도 교동섬으로 데려다 주기도 할 것이다. 

 

추천의 말 

 

사람을 다루는 기술보다 그 따듯함과 인간다움을 상찬해 마지않는 눈빛, 호통 치는 인간, 분노가 거세된 그런 세상에서 아직 섬세한 긴장을 놓지 않은 가슴. 세대의식과 시대정신 속에서 역사의 징검다리를 놓으려는 부지런한 발걸음으로 우리 가운데 더불어 살고 있는 박철 목사는 가난하면서 넉넉한 웃음을 잃지 않은 뜨거운 왕소금 같은 사람이다. ― 송병구(감리교 본부 목사) 

 

박철의 느릿느릿 삶은 '미련곰퉁이'의 삶이다. 그렇게 빠른 눈치를 보지 않고, 그저 자신의 정도를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느린 걸음으로가 아니라) 살아가는 삶이다. 세상에 영합하기에 느리고, 진실을 증언하기에 빠른 삶이다. '느릿느릿'이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를 불리는 바람몰이도 아니고, 그저 각자가 자신이 속한 곳에서 느리면서 빠르고, 약하면서 강하고, 순종하면서 반항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삶의 방식이다. '느릿느릿'은 또한 제자리에 머무르는 정체된 자기만족이 아니다. ― 김광진(과테말라 거주 한인 의사)

 

박철의 글과 사진은 따뜻하다. 그의 글은 질그릇처럼 투박하나 깊은 울림을 준다. 사람을 보거나 사물을 대하는 눈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자연의 교감을 통해 이미 깊은 영성의 세계에 도달한 듯하다. 그의 글에서는 연한 들국화 향기가 난다. 또 그의 사진은 한겨울 화롯불에 군밤을 구워 먹고 싶은 충동을 느낄 만큼 푸근하고 인간적이다. ― 최광훈(사진작가)

저자 및 역자 소개

지은이 : 박철
예배 때 사도신경을 잊어버리고, 성도의 이름을 잘못 기억하고, 때로는 아내까지 잃어버리고 다닐 정도로 안 잃어버리는 게 없는 구제불능 건망증의 소유자이지만, 이러한 사실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 솔직함과 소박함, 하느님과 사람을 향한 열정으로 20년 가까이 농민들 삶에 뛰어들어 목사로서, 시인으로서 자신과 주변의 삶을 노래하며 살고 있다.
진솔한 이야기와 직접 찍은 사진들을 올려 <느릿느릿 이야기> 홈페이지를 운영하면서 '느릿느릿'의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함께 정신없이 세태에 발맞춰 가지 않고 자기의 길을 꿋꿋이 나아가며 삶의 그윽한 향기를 나누고 있다. <느릿느릿 이야기>는 오마이뉴스에도 연재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어느 자유인의 고백》,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
언제나 친구 같은 아내, 엉덩이가 함지박만하게 훌쩍 커버린 징그러운 두 아들 아딧줄과 넝쿨이, 늦둥이 딸 은빈이와 함께 현재 강화 교동섬에서 살고 있다.

느릿느릿 이야기 홈페이지 http://slowslow.org

목차

하나 꼴찌가 첫째 되는 곳, 교동섬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사람 

들꽃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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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과수기와 시래기 된장국이 먹고 싶을 때>

한번은 비가 질금질금 내리는데 지정자 아주머니가 과수기를 삶아 또 머리에 이고 오다 소낙비를 만났다. 다시 집으로 갈 수도 없고, 미끄러운 논두렁길을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장대비를 뚫고 사택에 와서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전도사님요, 전도사님요, 나와 보시래요. 과수기 끓여 왔어요!"깜짝 놀라 나가 보았더니 쟁반을 덮었던 신문지는 빗물에 젖고 찢어져 너덜거리고, 미끄러운 길을 넘어지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자주 기우뚱거려 과수기는 절반이 넘게 쏟아져서 지정자 아주머니 등에 국수 가락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것이었다.갑자기 목에서 뜨거운 것이 왈칵 치밀어 올라왔다. 지정자 아주머니를 방으로 들어오시게 한 다음, 다 식은 과수기를 먹는데, 눈물 콧물이 쏟아져 과수기를 먹는 것인지 눈물 콧물을 먹는 것인지 모를 정도가 되었다. "목사님, 지가유.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지만, 오늘날꺼정 하느님 은혜로 살아왔시유. 그란디 한 번도 주의 종님들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대접 못했어유. 그래서 내가 죽으면 그게 제일로 한이 될 것 같아 이번 집회에 강사 목사님과 우리 박 목사님 점심밥 한 끼 대접하고 싶은디유. 이 할망구가 주책이지유. 내가 아까 교회에서 목사님 광고하실 때 창피해서 손을 못 들겠더라구유.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는디유. 목사님 제 청을 들어 주실라유?"이현주 목사님과 나와 아내 셋이 임봉순 할머니 댁을 방문했다. 군불을 얼마나 지폈는지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담요를 깔고 앉았다. 임봉순 할머니가 음식을 차리기 시작하더니 한 상 가득히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차려 놓았다. 그릇도 거의 옛날 사기그릇이었고 반찬은 전부 나물 종류였다. 임봉순 할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다."목사님, 지가유, 돈 주고 산 건 하나도 없어유. 지가 작정하고 지난 봄부터 준비한 나물이어유. 고기 반찬은 없지만 맛있게 잡수세유."이현주 목사님이 감사기도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현주 목사님도 목이 메는지 기도를 하다 잠시 멈칫했다. 음식은 모두 정갈했다. 국은 시래기 된장국이었다. 이현주 목사님은 공깃밥을 덜어 국에 전부 말더니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음식을 드셨다. 그리고 반 공기를 더 달라고 하시곤 마저 다 잡수시는 것이었다. ― 본문 23-27쪽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 

예배를 마치고 나오시는 교우들의 손을 붙잡고 일일이 "얼마나 힘드세요. 힘내세요!" 하고 인사를 드린다. 고단한 육신은 천근만근인데 그래도 빙긋 웃으신다. 눈물이 핑 돈다. 어떤 할머니들은 얼마나 힘들고 고단한지 '끙끙' 앓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제발 일 좀 적게 하세요. 기계도 오래 쓰면 고장나서 못 쓰는데 사람 몸이 어지간하겠어요. 좀 쉬엄쉬엄하세요." "네!" 대답은 그렇게 하지만 일을 놔두고 가만히 있는 분들이 없다. 시방 온 산천경계에 꽃이 만발했다. 그 흔한 들꽃 하나 눈여겨볼 여유도 없이 농촌의 하루 일과는 바쁘게 돌아간다. 오늘날 농민들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지만 농투성이들의 억센 손이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아름다운 손이다. 그 손으로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 이만큼 키운 것이다. 하느님이 주신 두 손,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하겠다.― 본문 65-66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