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잠든 모습을 보며

리영 리 지음 | 장경렬 옮김

발행
2000년 01월 15일
쪽수
124 쪽
정가
5,000원
전자책
ISBN
978-89-88344-11-8
판형
128   x  188 mm

책 소개

바늘같이 섬세한 이슬비를 맞이하는 연못처럼

- 리영 리의 시세계

 

조금 먼 곳에 한 남자가 있다고 생각하자. 섬세한 감수성과 깊은 눈, 한 곳을 응시하는 긴 시선. 세월의 깊이 만큼 추억이 축적되어 감지될 듯 일렁이는 몸을 가진 남자.

 

그 한 남자가 정오에 잠이 든 누이를 바라보고 있다

 

"1

이 사람은 정오에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가 아니라

소파에서 잠이 든 나의 누이이다.

그리고 나의 정적을경외감으로 잘못 알지 말기 바란다.

나는 다만 누이를 잠에서 깨우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내 비록 그녀의 턱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싶고,

거울을 바라보듯 허리 굽혀 바라보고 그 얼굴에 입 맞추고 싶지만.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잠시 동안 바라본 다음, 조용히

떠날 것이다, 지금은 정오,

휴식의 시간, 포근함의 시간,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잠드는 시간이기에."

-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잠든 모습을 보며

 

고요한 정오에 그림자까지 느껴지는 그림이 그려진다. 그의 연못을 찌르는 빗방울같은 감수성을 하나 더 골라보자.

 

"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안으로 취하기 위해,

우리 안에 과수원을 간직하기 위해,

껍질뿐만 아니라 그늘까지도 먹기 위해,

단맛뿐만 아니라 나날의 세월을 먹기 위해,

두 손에 과일을 들고 흠모하기 위해, 그리고

복숭아의 둥근 기쁨을 베어 물기 위해."

- 꽃으로부터

 

이렇듯 한줄 한줄 읽을 때마다 마음의 파문을 만드는 이 남자는 누구인가? 이 남자 리영 리를 말하기 위해서는 그의 아버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부친은 수카르노 치하에서 정치범으로 1년을 복역한 후 홍콩, 마카오, 일본 등지를 떠돌다 미국에 정착했다. 그의 부친은 모택동의 주치의와 스카르노의 의료고문이었다. 정치범으로 몰려 인도네시아를 탈출하여 세계 곳곳을 유랑하던 아버지를 따라 끝내 미국으로 건너가 장로교 목사로 여생을 보냈던 아버지. 이러한 아버지의 인생 역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 역시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운 유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시를 읽으면서 점점 매료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시는 언뜻 보면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가만히 눈여겨보면 빛과 어둠이 녹아있음을, 지혜가 추억을 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실을 현실 이상으로 들어 올리는 그 힘. 그래 처음부터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처음 소설가 김지원 선생님으로부터 소개를 받았다. 미국 대학에 계신 친구분이 선물로 주신 것인데 요즘 미국에서 새로이 읽혀지기 시작한 시집이며, 주목받고 있는 시집이라고 소개를 받으셨다고. 우리는 이 시집을 놓고 그저 "좋은 것 같애."라는 말만했다. 현실이 추억이 되고, 그 추억이 지혜를 일깨우는 그 힘 ― 오랫동안 쌓인 "추억의 힘속에서 삶의 지혜가 녹아나오는 바로 그 현장" ― 이 "한 편의 시" 속에 녹아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시를 읽을수록 점점 더 그의 시세계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삶의 편린들이 지혜로 살아나는 그의 시집을 안도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추억을 불러내는 마술적인 힘이 느껴지는 시집이다. 좋은 시인은 추억을 내팽개치지 않으면서 그 무게에 짓눌리지도 않는다. 리영 리가 그렇다. 부드럽고, 쉽고, 달콤하고, 슬프고, 감동적인 시들을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 우리는 이 세상의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어느 한 사람을 깊이 만나기 위해 이 책을 번역했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깊이 만나는 것이 아닐까? 좀 먼 곳에 있는 한 남자.

저자 및 역자 소개

지은이 : 리영 리
1957년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중국인을 부모로하여 태어났다. 1959년 그의 부친은 수카르노 치하에서 정치범으로 1년을 복역한 후 가족과 함께 인도네시아를 탈출한다. 1959년에서 1964년까지 이들은 홍콩, 마카오, 일본 등지를 돌아다니다 결국 미국에 도착한다. 리영 리는 피츠머그 대학, 아리조나 대학, 브록포트 소재 뉴옥 주립 대학에서 수학하였고, 가족과 함께 일리노이 주의 시카고에 거주하고 있다. 현재 시인은 의상 악세서리를 만드는 회사에서 아티스트로 일하고 있다.

옮긴이 : 장경렬
1977년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했으며, 1988년 미국 텍사스 대학교 영문과에서 박사 학위 취득했다. 현재 서울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The Limits of Essentialist Critical Thinking: A Metacritical Study of the New Criticism and Its Theoretical Alternatives(1990, 서울대학교 출판부, 영문판), ≪미로에서 길찾기―장경렬 비평집≫(1997, 문학과 지성사)가 있다.

목차

서문

 

I

서한

선문

감미로움의 무게

꽃으로부터

머리카락을 꿈꾸며

이른 아침에

추락, 암호와도 같은

야상곡

나의 인디고

창포

혼자하는 식사

 

II

언제나 장미 한 송이를

 

III

함께 하는 식사

어머니에게 노래를 청하다

재, 눈, 또는 달빛

울고 있는 소녀들

머리 땋기

비 일기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잠든 모습을 보며

연상 기억법

계절의 사이에서

환영(幻影)과 해석

 

역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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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잠든 모습을 보며

 

1.

이 사람은 정오에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가 아니라

소파에서 잠이 든 나의 누이이다.

그리고 나의 정적을

경외감으로 잘못 알지 말기 바란다.

나는 다만 누이를 잠에서 깨우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내 비록 그녀의 턱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싶고,

거울을 바라보듯 허리 굽혀 바라보고 그 얼굴에 입 맞추고 싶지만.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잠시 동안 바라본 다음, 조용히

떠날 것이다. 지금은 정오,

휴식의 시간, 포근함의 시간,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잠드는 시간이기에.

 

2.

어머니의 방에서

내가 훔친,

뼈를 깎아 만든

사랑스러운 빗에는

머리카락이 끼어 있다.

어머니는 주무시고 있고,

오후가 다가온다,

하나의 질문처럼.

어떤 놀이를 할까?

 

3.

여름의 하얀 미로.

긴장의 시간인 오후가

다가온다. 내 아버지의

낮잠 시간이다. 바깥에서는 비둘기 한 마리가

길게 뻗어 있는 단풍나무 숲에 길을 만든다. 집안은

조용하다. 매 분(分)의 시간이,

햇빛에 바랜 넓은 응접실에서, 먼지가

수를 더해 가는 방에서,

내가 내 형제들과 속삭이는

비밀이 되어 가고 있다.

 

아무도 자신의 저고리가 눈이 멀어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 pp.98-99